잠시 멈추다
글쓰기를 잠시 멈췄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삶에 충실했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휴식을 비로소 알았다.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 몇 가지를 알고 있다. 올여름에는 휴식의 의미를 알았다.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은 채, 오로지 나를 위해 소모하는 휴식.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에서 벗어나는 게 이리도 어려운지 몰랐다. 어쩌면 목표를 위해 할 일을 찾는 건 쉽다. 우리가 늘 해오던 관성이니까. 그러나 관성을 벗어나려면 힘이 필요하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 가끔은 지구의 자전이 멈춰도 모든 게 괜찮을 거란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야 관성을 이겨낼 수 있다.
작년에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법을 알았다. 글은 강력한 표현 수단이다. 생각을 정제된 글로 정리하는 것만큼 확실한 게 있을까. 가끔은 즉흥적인 표현으로 생각을 쏟아내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말로 쏟아낸 생각들을 글로 다시 정제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비언어적 표현들이 최소화되며 생각이 명료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있다. 그러나 분명 실보다는 득이 크다. 덕분에 내 가치관을 공고히 했고, 내 삶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도 알았다. 그러한 생각의 표현은 ‘나’의 존재 이유가 된다. 표현은 잊어버린 나를 다시금 되찾아주니까.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을 보고 한참을 웃는 방법, 밤에 산책하며 별을 바라보는 방법, 좋아하는 앨범을 30분 내내 들으며 집중하는 방법, 책을 읽으며 나만의 생각을 키워나가는 방법, 운동할 때 온전히 그 순간에 몰입하는 방법, 이처럼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나는 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17살의 내가 세운 ‘현재의 내가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과정이다.’라는 발판 위에 서 있다. 이제 ‘~하면 행복할 텐데’라는 가정 속에서 살지 않는 법은 내게 너무나 중요하다.
여전히 나는 수많은 무의식의 관성에서 살고 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관성, 내 통제 속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관성,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간은 회피하는 관성들이 있다. 이제는 그러한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더욱 나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발버둥, 언젠가 관성에 못 이겨 스스로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쩌면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중심을 돌 수도 있고, 심지어는 똑같은 궤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력만 바꿀 수 있다 해도 괜찮다. 나는 내 행성을 사랑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