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유서
작년, 작열하는 태양이 수그러드는 여름의 막바지에서, 나는 나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답게 죽을 수 있을까요? 생(生)을 위해 몸부림쳐온 나라는 존재가, 실은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걸 비로소 느꼈습니다. 그제서야, 피어나오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공명했습니다.
처음엔 막연하게 조력 자살 같은 걸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두 팔을 벌려 죽음을 껴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무서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하려 해도 무섭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걸 상상만 해도 도망치고 싶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저는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그저 죽음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확 집어삼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혹여 교통사고나 추락 등 사고사로 죽었다고 안타까워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바라던 죽음이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제가 삶을 지탱하는 게 어렵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무너뜨려 주세요. 저는 꽃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있는 생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해 주변인을 괴롭게 하거나, 고통 속에서 어떤 몸부림을 쳐도 어느때와 같이 걷고, 말하고, 듣고, 보는 일상을 전부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다면, 지체 없이 저를 삶의 끝자락에서 밀어주세요.
기증된 장기는 부디 보람 있는 곳에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구에 쓰인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진리 탐구에 조력자로 함께하는 건 크나큰 영광이니까요. 그렇더라도 장기가 필요한 생명이 있다면 지체없이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제 살더미는 자연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화장처럼 환경이 오염되는 방식은 싫습니다. 될 수 있다면 벌레나 곤충 같은 생명의 먹이가 되고, 토양의 양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미래에 어떤 방법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되었든 자연에 이로운 방향으로 제 시신을 사용해주세요.
노화가 채 진행되지 않은, 어쩌면 삶의 초입에서 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한 다짐들이 어리석다는 걸 알려면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5년 전을 보면 너무나 어리석은 판단이 많았던 것처럼요. 가치관의 변화로 내용이 수정되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이 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리석은 다짐이라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 분씩 이름을 부르며 거론하고 싶지만, 그러면 유서보다는 축사에 어울리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를 묶어 한데로 칭한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저의 곁에서 함께 성장해나간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모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제 빈자리를 너무 크게 느끼지 말아 주세요. 제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좋지만, 그렇기에 더욱 다른 사람의 일상을 망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를 유유히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