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 세계

책장엔 은유가 가득한 사람이고 싶었다.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으로 빼곡한 제목 사이를 누비고 싶었다. 가벼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한없이 밀려드는 삶의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시 한 문장에, 고작 한 단어에 구원받고 싶었다. 하루가 끝난 저녁이면 카잔차키스의 기행을 따라 유영하고, 잠들기 전 밀려오는 허무에는 카뮈의 반항을 거머쥔 채 'Non'을 중얼거리길 바랐다.

세상 속 모든 생명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눈 앞의 나무를 보고 구별할 수 있으면 했다. 산을 오르며 마주친 야생의 꽃과 벌레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온갖 지형을 누비는 방랑자이고 싶었다. 험준한 산을 오르며 바위 앞에 겸손해지고, 바다 속을 헤엄치며 자유를 느끼길 바랐다.

악보에 담긴 감정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고 싶었다. 착잡한 날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이끌리는 곡에 빠져들고 싶었다.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내고 싶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신경의 전기 반응을 마티스처럼 붙잡고 싶었다. 가벼운 한 획 속에 모든 게 담겨있길 바랐다.

저편에서의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까. 운 좋게 될 수 있었던 세계를 상상하며 소망을 비추어본다. 차분한 밤공기 속에서 찌뿌둥한 몸을 켜인다. 피곤한 몸으로 올려다본 곳에는 나무와, 달과, 창백한 구름이... 기시감을 느낀다.

모든 가능성 속에서 부끄럽고 창피했던 나날을 떠올린다. 돌아간다면 하지 않았을 무수한 선택들의 연속. 과거의 부끄러움이 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인 이들에게, 지금의 나는 조금이나마 더 나아졌으니 나쁘게만 기억하지 않아주었으면. 나 또한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