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언젠가부터 몸을 괴롭히지 않으면 정신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시계에 밥을 주듯, 몸에 달린 태엽에 정기적으로 밥을 주어야 한다. 달리고, 수영하고, 등반하고... 무엇도 더 할 여력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저 러닝화를 신고 나갈 뿐이다.
달리기 그 자체를 인식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스스로 달린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타인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남에게 자랑하고 대단해 보이려는 욕심으로 달리고 있었다. 운 좋게 빠른 성장을 거머쥔 점도 한 몫했다. 마른 체형, 준수한 지구력. 제대로 된 훈련 없이 선망하는 기록을 향한 꿈과 열정만을 도둑질했다. 내게는 달린다는 행위가 삶과 호흡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의 증명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신을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풀코스를 위해 7:30 페이스로 달리는 도중, 문득 이 문장을 체험했다. 편한 호흡으로 달리니 주변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아려오던 무릎 뒤쪽의 통증도 없었다. 축축한 공기가 그다지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숨을 쉬고 있다는 감각을 받아들였다. ’왜‘를 물어보던 지난날의 가치관들이 달린다는 행위를 향해 전속력으로 부닥쳤다. 삶과 행복, 무의미와 기쁨. 그렇구나, 달리기는 사는 것의 메타포였구나.
여전히 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 기록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다. 또, 더 나은 기록을 위해 무리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내겐 여전히 달리기로 보여낸 객관적인 지표가 중요하다. 그것이 나를 갉아먹는, 언젠가는 스러져 버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건 지나친 합리화다. ’살아가는 사람‘에게 목적의식과 성취는 전제 조건이니까.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당장 나를 지나쳐간 러너를 따라잡지 않아도 된다. 함께 달리는 이가 숨이 가빠옴에도 구태여 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랑할 필요도 없다. 묵묵히 나를 지탱할 근육들을 공들여 쌓을 뿐이다.
이제는 마라톤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뻔한 말을 알 것 같다.
목표는 결승선이다. 순간에 일희일비하며 무리해서는 안 된다. 저마다의 페이스를 따르며, 숨이 가빠오고 다리가 저려도 끝까지 달려야만 한다. 동시에 함께 즐겨야 한다. 응원해 주는 이에게 힘차게 답을 하고, 함께 달려 나가는 이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과정을 괴롭게만 생각하지 말자.
가진 모든 힘을 다 써야 한다. 완주만으로도 멋진 일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완주를 위해 전부 소진했냐는 사실이다. 전부 소진하지 않고서 통과한 결승선이 아쉽지 않을 리 없다. 누군가는 이미 끝난 일을 아쉬워하지 말고, 그저 결과를 즐기라고 한다. 내게는 진부하다. 만일 내 전부를 보여내지 못했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로 가져가고 싶다. 지난 후회와 아쉬움이 없는 것마냥 합리화하기보다, 더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가진 모든 걸 연소시킬 수 없다.
아픈 결과마저 다름 아닌 ’내‘ 삶의 조각이다. ”방황한 시간마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소중한 시간이다“라는 말은 과거의 나날들이 아프고 쓰렸다는 일과 모순되지 않는다. 지나온 나날들이 전부 최선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일, 이게 내가 바라는 ’삶을 향한 사랑‘이자 내가 받아들인 ’아모르 파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