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기억과 기록

우리는 온전한 존재이기 위해 불완전한 기억을 지녔다. 뇌과학 수업과 여러 서적을 통해, 기억은 ’있었던 장면을 그대로 포착‘하는 게 아닌, ’자신의 상상력을 빌려 재구성‘한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더 나아가 기억의 디테일들이 망각의 과녁이 되고 나면 완전히 다른 사실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뇌의 작동 방식에 대해 알고 나면 뇌의 착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고, 이성적 사고와 관계없이 ’지각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기록은 탄생했을 것이다.

단순히 상황을 열거하는 기록에서 더 나아가면 ’대상‘이 존재한다. 어떠한 목적을 가진 채 ’나의 지각‘이 기록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물론 지각이 온전히 배제된 기록은 없지만, 상황의 열거를 벗어나는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게 지각하며 글을 쓰다보면 생각들이 온전하지 않고 이리저리 흩어져있음을 깨닫는다. 가령 수영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은 수없이 많지만, 물과의 교감이라는 가치는 글로 적고난 뒤에야 찾았다. 이처럼 파편화된 대상을 최대한 긁어모아 하나의 서사를 만드는 과정이 글쓰기다. 하루키가 스스로 ’글자로 쓰지 않으면 사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쓴 건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흩어진 경험을 모아 새롭게 조각하는 일. 생각조차 못했던 가치를 발견하는 일. 그것이 진짜 경험이 아니라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들, 서사를 만드는 힘을 평가절하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이 힘은 나를 지탱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나 없이 살아가는 세계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살아간다. 사랑은 낭만적이지만, 그렇기에 슬프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은 내게 사랑을 돌려줄 수 없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나를 살아있도록 만든다. 무의미의 늪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살아도 괜찮다는 답을 내놓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글을 쓰고 싶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며 묻는다. 뭐하자는 거지? 살아서 뭐 하게? 답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기 위해서. 그것도 최선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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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적으로, 창조적으로, 비판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담아 지금 이 시기 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글로 쓰는 것이지.”

  •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