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 일상

전역한 지 얼추 반년이 지났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절반은 일상을 굳게 다지려는 노력, 나머지 절반은 현실적인 가치를 위한 절박한 뜀박질. 후자는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지만, 다행히 일상은 보기 좋게 다듬어졌다.

대학동에 방을 구하고 혼자 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일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무엇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어떻게 정리해서 청결을 유지할지, 또 '나의 방'이라는 철학을 어떻게 보여낼지 전부 나의 몫이란 사실이 좋았다. 일상을 온전히 스스로 꾸려나가는 일은 생의 약동 그 자체니까.

방 안에서 습관처럼 하는 모든 행동들이 온전하길 바랐다. 이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반복되는 일상이 약간이라도 행복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꽤 멋진 문장을 썼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고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하루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일'이 왜 바람직한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구태여 객관적인 논거들을 늘어놓을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일이지 설득해야 할 일이 아니다. 존재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서도 삶을 사랑하고자 결심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전제니까. 이를 기꺼이 거두고 나면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나 1시간 내내 달리는 행위에 그다지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를 가졌으면 했다. 특정 물건의 정확한 자리를 익히기는 어려우므로, 얼추 어느 공간에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어야 했다. 각 서랍과 수납 박스마다 특정 카테고리를 정했다. 그러고 나니 깨끗함은 알아서 따라왔다. 청소기를 돌리거나 바닥을 닦는 건 무료할 때 종종 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건 널브러진 물건들을 빠르게 정돈하고, 필요한 물건을 최소한의 어지럽힘으로 꺼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물건을 줄여야 하는데... 늘리는 건 쉽지만 줄이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지금도 어느 공간에 무엇을 놓아야 할지 고민하며 조금씩 바꾸고, 또 할 수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는 중이다.

다음으로는 잠만 자는 공간이 되는 걸 경계했다. 이 공간은 나를 드러내는 은유니까. 무의식적으로 들여온 식물이 어떤 종류인지도 그간 살아온 경험과 가치관이 모인 결과라 생각한다(실은 사소한 행동 전부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내 방이 살아있길 바랐다. 책과 함께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식물들을 데려왔다. 핑크 싱고니움과 그냥 싱고니움, 그리고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복잡한 품명의 안스리움. 언젠가 식물에 대해 쓰게 될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적당한 관심으로 무던히 돌보는 행위가 주는 기쁨이 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주는 각별한 평범성. 햇빛을 보여주기 위해 매번 창틀 위로 화분을 옮기는 일을 목마를 때 물 마시듯 하는 습관이 되고 나면, 식물은 인테리어 요소가 아닌 공간 그 자체가 된다. 책꽂이에는 많은 영향을 받고 또 내가 사랑한 책들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커피 공간을 마련해 두고, 냉장고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붙였다. 그렇게 '나'로 하나씩 채워 넣었다.

먹는 일은 꼭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었다. 원래 요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박준 시인이 쓴 산문에 더 큰 이유가 있기도 했다.

"먹는 일이 곧 사는 일 같기 때문입니다. 먹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는 날에는 사는 일도 지겹고, 사는 일이 즐거울 때는 먹는 일에도 흥미가 붙습니다. 저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국어사전을 보아도 ‘먹다’와 ‘살다’는 이미 서로 만나 한 단어가 되어 생계(生計)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먹고살다.’"

먹는 일이 사는 것과 다름없다면 더더욱 내 손으로 직접 빚고 싶었다. 특별한 음식으로 맛에 감탄하며 먹는 일회성 요리가 아닌,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식사들을. 학기 중에는 아침에 등교해서 저녁에 집에 온다. 그래서 점심으로 도시락을 챙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씻자마자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점심 도시락을 싼다.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매일 아침이 엄청 분주했던 느낌은 확실하다. 그래도 학교에서 챙겨 온 도시락을 먹을 때면 늘 기분이 좋았다. 전역 후 지금까지 친구와 약속이 있던 걸 제외하면 밖에서 사 먹은 일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꾸준히 요리했다. 요리가 재밌기도, 또 잘할 수 있기도 해서 다행이다. 별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늘 그러고 싶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되도록 쉬지 않으려 했다. 인생을 온전히 보내는 데 있어 확실히 스포츠는 필수다. 군대에서 해오던 달리기를 꾸준히 하는 중이고 클라이밍도 시간이 나는 대로 계속했다. 무엇보다 운동하고 나면 확실하게 행복해진다. 시험기간 동안 잠시 운동을 놓았다가 다시 러닝화를 신었을 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우울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며 우울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듯이, 운동하고 나면 그제야 운동이 필요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 같다.

그리고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놀이는 좋아하지만 수영을 배운 적이 없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전역 후에는 꼭 수영을 배우리라 다짐하고 2월부터 꾸준히 아침 수영을 하는 중이다.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어떤 경험이든 늘 가치 있고 즐거운 일이지만 수영은 좀 더 특별하다. 온몸을 둘러싼 물을 밀어내는 감각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 있다. 수영은 생존을 이유로 의무 교육에 필수라 주장하지만, 나는 생존보다도 물과의 교감을 우선순위에 두고 싶다. 물속을 나아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모르고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세계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건 매 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순간을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을 없애려 노력했다. 학교 강의 시간에는 핸드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두고 책가방 깊숙이 던져 넣었다. 노트북에 카카오톡을 설치하지 않고, 핸드폰에서 유튜브를 삭제했다. 애플워치는 하루 종일 알람이 울리지 않도록 설정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강의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떠도는 집중력을 무서워했다. 아무리 맛있는 밥이라도 핸드폰을 보며 먹으면 무슨 맛이었는지 잘 안 떠오른다. 먹는 행위마저도 이런데 하물며 강의는 어떤가. 물론 집중 없이도 수업 내용을 착실히 복습하고 문제를 풀며 좋은 성적이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강의자와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복습할 수 없다. 강의에 참여해 함께 수업을 만들어나가는 경험은 그 순간에 집중해야만 얻을 수 있다.

더불어서 대화 중 상대의 긴 맥락 속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물론, 자신의 이야기조차 온전히 풀어내지 못하는 이들을 많이 마주했다. 상대와 밥을 먹는 동안 눈에 보이는 곳에 핸드폰을 두고, 대화의 공백 사이에 틈틈이 확인한다. 자신의 일상을 스토리로 간단없이 남에게 공유한다. 사회적 네트워크의 연결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외로움도 허용하지 않는 이는 죽는 순간까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게 있다. 그들의 대화에는 '그들만의 일상'이 없다. 늘 반복되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속에 즐거움과 놀라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유행하는 주제와 가십거리만을 논하기 바쁘다. 그럴 수밖에. 그들의 인생에는 공백이 없고,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쏟아지는 정보를 전부 먹어치워야 하니까. 문명을 멀리하고 네트워크를 끊으라는 주장이 아니다. 그저 인생을 온전히 사는 데 있어 관계의 공백, 외로움은 필수라는 것이다. 나 또한 혼자 여행하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공유할 경험이 있는 여행이 좋다. 똑같은 밥이라도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그러나 공백이 없는 이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취미에 대해 묻는다. 이 질문에는 나만의 의중이 있다. 오직 홀로 남겨진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그토록 기다리던 금요일 저녁이 왔을 때 누군가와의 약속이 없다면, 그 하루를 온전히 자신의 날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온전한 하루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은 없지만, 그저 유튜브를 보거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도는 하루는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 나도 여전히 노력 중이다. 지금 시대에 태어난 이상 죽는 순간까지 자극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만 나중에 내 아이와 밥을 먹을 때 영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어디론가 멀리 떠날 때 교통 속에서 게임을 쥐어주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내가 그러지 않아야 한다. 일상에서 핸드폰을 안 보이는 곳에 두기, 상대와 함께 있을 때 대화에 집중하기, 자기 전 스트레칭으로 몸의 긴장을 풀어주기, 책 읽기와 자는 것 외에 침대 위에 눕지 않기 등 사소한 많은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부터 하루를 온전히 보내야만, 그것을 물려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래야만 나의 매 순간이 버림받지 않을 테니까.

많은 글들이 미완인 채로 남겨져있다. 내 일상이 다듬어진 뒤에 다시 바라보고 싶었다. 이제는 써나갈 차례인 것 같다. 나의 세계를 공고하게 만드는 글을 적어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