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없는 세상

잠시 시계가 없는 세상에 살다 왔습니다. 그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잡지 않더군요. 태양이 뜨고 저무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계절의 변화도 흐르는대로 두었기에, 은행잎으로 물든 오솔길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세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레 전 먹은 저녁 반찬을 기억 못 하듯이요. 다만 세월을 짐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련이 필 무렵, 무릎에 닿을까 했던 옆집 꼬마의 정수리가 어느새 허벅다리까지 온 걸 보며 ‘곧 단풍이 들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혹은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는 입술 위로 까슬까슬 길이 트이고, 밥을 먹으려 입을 벌리다 은은한 피맛이 길 위로 번져나오면 추위를 대비할 장작을 구비했고요. 서귀포 해안가 어귀에서는 잦아든 겨울 바람을 타는 철새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는, 쉬이 벚꽃 놀이를 가겠구나 하며 마음이 들뜨곤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나이듦을 삶의 양식으로 따졌습니다. 으레 계단을 점잖게 한 칸씩 내딛으면 어른이고, 두 칸 넘게 성큼성큼 오르내리면 청소년이었습니다. 간혹 몇 어른은 학생 요금을 내려다 영화관 앞 계단에서 삐끗해 망신을 당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는 겸연쩍게 한 칸씩 디디며 어른이 되었죠.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흐르는대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닥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저편으로 뉘엿거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눈꼬리 끝에서 흘러나오는 주름의 물줄기가 낯설었습니다. 눈가부터 입가, 목덜미까지 어색한 손길이 흘러내렸습니다. 문득,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은 구청에 들러 노인 등록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너털 웃음이 나왔습니다. 들려오는 웃음 소리도 제법 할아버지같아 더 크게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하하. 하.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