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남기고 싶은 마음
창가 자리에 앉아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정적이면서 차분한 멜로디의 피아노가 다른 음향과 함께 더욱 돋보일 때 즈음 문득, 지금 하는 생각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은 아주 손 사이를 쉽게 빠져나오는 모래와 같아서, 어디론가 보관하지 않으면 점점 새어 나온다. 결국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의 주름에 끼인 채 몇 안 되는 알갱이들만이 남는다. 주름이 늘어나는 만큼 끼인 알갱이들도 늘어날 테지만, 그만큼 어디론가 떠나버린 모래 더미들도 많겠지. 그래서 그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상자 안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지금 이 기억들이 너무 아깝다고.
공부는 언제나 내게 원동력을 준다. 비록 선형대수학이 B-라는 처참한 성적을 주었지만, 또 하나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 지식 자체로도 좋고, 지식을 통해 남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며 과시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물론 건강하지 못한 지식의 활용이란 건 안다. 나 자신의 허영심을 줄여보려고 노력을 해봤는데 잘은 안된다. 나 스스로 정말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마는,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스노비즘은 감추기 참 어려운 것 같다. 지식을 정말 멋있게 활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롤 모델로 조승연을 삼는 중이다. 아무튼, 순수 수학은 어려우면서도 참 '재미있다 느낌을 강하게 준다.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닌가. 어려우면 재미라도 없든지. 배우는 내내 감탄의 연속이었다. 이런 지식을 수월하게 즐길 수 있는 이들을 시샘하면서도, 지금 이렇게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며 나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 신경을 덜 쓴 성적은 언젠가 내게 후회로 나타나겠지만, 그래도 내가 재미있게 즐겼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뭐, 미래에 내가 알아서 하겠지.
‘인생을 살며 한 번쯤은’ 어쩌면 내 인생을 관통하는 문구이기도 하고, 대학 생활을 전반적으로 지배했던 문구이기도 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한겨울에 스쿠버 다이빙을 해보고, 또 이 순간이 아니면 언제 내가 연극의 주연을 맡아 보겠는가. (그것도 2인극의!) 숨을 쉬기에 할 수 있는 나의 모든 행동에 감사함을 느낀다. 하나씩 돌아보며 감사함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이런 환경의 버팀목이 되어준 부모님이 감사하다고 느껴진다. 내일은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지. 물론 이런 생각이 가져다주는 건 피로 가득한 스케줄이다. 배우 연습하는 것도 재미있고, 나름의 자기 계발도 좋지만 가끔은 정말 나를 위해 쉬는 시간을 보내도록 하자.
요새는 일렉트로닉 뮤직에 푹 빠졌다. 커피 원두를 핸드 드립해서 마실 때 종종 듣던 재즈 취향이 조금씩 옮겨지며 잠시 정착 중이다. 신나는 EDM이 아니라 잔잔한 프렌치 계열의 R&B 느낌.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난다. FKJ의 라이브를 듣다 보면 절실하게 직접 두 귀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루프 스테이션을 어떻게 이리 섹시하게 활용하는지. 가끔 생존 신고 겸 꺼내서 부는 하모니카도 좀 더 자주 연습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얼른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좋은 곡을 깔끔하게 연주하는 실력이 되었으면.
여전히 나는 사람들에게 마냥 편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생각이 조금 삐뚤어져 있고, 나만의 신념과 고집이 확실하다. 허영심이 꽤 강하기도 하고. 마냥 인간말종 유형의 인간은 아니겠다만, 까다로운 인간은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에서 함께 해주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원체 연락이란 것에 대해 무딘 사람이라 아니꼽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주 못 보고, 또 안부 연락조차 뜸한 사람에게 언젠가 다시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 시간이 기억의 모래들을 흩뿌리더라도, 주름 사이에 남은 알갱이들은 여전할 테니까. 어처구니없는 타이밍에 연락하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 연락을 했을 때 조금은 너그럽게 봐주었으면 좋겠다. 이 문장으로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연락을 받을 미래의 당신들에게 미리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물론 나를 보며 왜 이제야 하냐며 박대해도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것은 내 성격과 환경이 낳은 부산물이니까. 이제는 기다린다. 모든 것에 때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