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한 정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그렇지 않다는 이에게는 박수를 쳐주되, 믿지는 말자). 그러나 자신을 이루는 무언가를 말하기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파고들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고, 설령 정확한 길을 찾았다 해도 마음의 벽이 깊은 내면을 볼 수 없도록 우리를 기만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어렴풋이 스치기라도 하려면 긴 시간 동안 안으로 침잠해야만 한다. 그러한 과정에는 추악한 나를 만나는 괴로운 시간도 있고, 초라한 민낯을 발견하고서도 알 수 없이 친근한 기분에 웃음 짓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저마다 방식은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런 노력을 한 이들은 분명 말의 깊이가 다르다.
말의 깊이를 측정하는 과학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는 몇몇 이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할 때, 그저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처럼 들린다. - 무엇이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며 하려고 마음 먹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아낌없이 사랑받는 존재다. 경험과 젊음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모든 건 유전자가 결정한다. - 그러나 베끼기에 급급한 이들이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피로를 느낀다. 그런 이들은 부모가 관련된 험담을 들으면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모님 건드는 건 좀 아니지’ 라며 정색한다. 그러나 왜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안 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사회의 많은 명제는 ‘그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앵무새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엇을 진실로 원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내던져진 삶을 주어진 관성에만 의지한 채 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삶을 즐기지 말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가치있는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 관심도 없었던 새에게 눈길을 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새롭게 보이는 행복을 느낀 이들은 안다. 다리가 욱씬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지도록 꾸준히 달려본 이들은 안다. 자기 전 숨을 가다듬고 침묵으로 명상해온 이들은 안다. 아니, 실은 그럴 필요는 없다. 그저 흐르는대로 살아도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물살을 타게 되더라도 잠시 멈춘 뒤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 조금이라도 나를 찾고 싶다. 훗날 그 모든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내게 피로가 아닌 호기심을 주는 이들과 함께. 이 글은 그러한 목적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