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장을 달리며

여름이 찾아올 무렵, 대운동장에 잔디와 트랙이 깔렸다.

원래는 대운동장과 호수, 테니스장을 크게 둘러싼 타원형 코스를 달리곤 했다. 길이 잘 되어있고 조경도 예쁘지만, 한 바퀴에 1.2km나 될 뿐더러 경사도 약간 있는 편이라 아주 좋지는 않다. 그래도 막사 앞 운동장 트랙처럼 건물에 가로막혀 답답한 기분은 없었다.

대운동장은 사방이 트여있었다. 모래 바닥은 야들야들한 인공잔디로 채워졌고, 축구장 바깥으로는 적절한 탄성의 트랙이 깔렸다. 대운동장과 바깥 도로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에는 가로수들이 줄지어 늘어졌다. 사방이 트여있었으며 한 바퀴에 350~400m 정도로 한 호흡이 너무 길지도 않았다.

가로등은 인도와 도로를 향해 설치되어 있었다. 해가 지고나면 밖을 향한 가로등 불빛이 약하게 반사되어, 마치 밝은 달빛이 비추는 것처럼 은은한 밤거리를 걷는 듯했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거무튀튀한 형체로 보였으며 5m 근방까지 다가가야만 그나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환한 낮보다 밤에 뛰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이런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달리기를 할 때면 저녁 8시즈음 이곳을 찾는다. 그러면 아무도 없는 깜깜한 트랙을 홀로 전세낼 수 있다. 실은 8시 30분부터는 청소 시간이지만, 타군에 파입되어 있는 나는 몰래 빠져나와도 누구 하나 뭐라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노래를 대놓고 크게 틀어도 들을 사람 없는, 온전히 나 혼자 뛸 수 있는 공간. 이 곳 위에서 나는 아무 생각없이 달린다.

땅바닥을 뭉개는 짓누름에 아슬아슬한 호흡을 맞추며 멀리 보낸다. 잎의 끝 모양을 보고 구상나무와 분비나무가 아닌, 전나무임을 확신했던 오전을. 영화를 보고서 충동적으로 골라버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먹어치우던 4일 밤낮을. 썼다가 구겨버리길 반복하며 저린 손목을 주물러댄 밤들을. 더없이 흘러가버린 시간을 값진 무언가로 채우지 못한 채, 대부분 삭제되었으며 남은 몇 개의 메모마저도 가당치 않아 자연스레 잊혀진 데이터 쓰레기들을.

아무 생각없이 달리며.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도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메모(1988.11.), 기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