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이유
여전히 그 무엇도 확정 짓지 못한 채 도서관을 어정거리다 한 문장이 꽂힌다. 정신적인 가출. 내용은 이렇다. 가출에는 예술 작품이 도움된다. 단순히 지식을 긁어모으는 게 아니라 사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에는 세상을 즐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학문과 이념이 의미가 있다. 안주해있던 정신을 벗어나 모험했던 짧고도 긴 나날이 고작 두 단어로 요약되었다. 내가 해온 건 정신적인 가출이었구나. 어떻게 살지 고민하다 왜라는 늪에 빠진 21살. 겨우 발버둥치며 어떻게로 돌아왔지만서도 이따금 권태의 밤을 설쳤던 22살. 무의미한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미약하게나마 느끼던 23살부터 이제 그 무엇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무엇에 헌신하며 사랑할지 찾고 있는 오늘.
이제 건방진 소리를 해보겠다. 대학은 학문을 탐구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를 대학생의 목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관성적으로 해오던 공부를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세포 단위로 환원될 수 없다. 사고와 행동을 생물학적 전기 자극 결과로 치부할 수 없다. 세상을 즐기고 사람을 사랑한, 수많은 사람을 울린 과학자 칼 세이건이 말하려던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면, 전시 작품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면, 혹은 광활한 풍경 앞에서 모든 감각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있었다면 내 말을 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삶에는 생각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지겹게 들어온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시덥잖은 소리에 코딩된 채 더욱 가치 있는 일을 놓쳐선 안 된다.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에 유리한 전공과목 3학점보다 그저 이끌리는 대로 수강한 교양 수업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보이는 게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각도 안 해본 경험 속에서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대체 그걸 20대 초,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세상의 다양성이 모이는 대학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언제 찾을 수 있을까. 사회의 거대한 구조 속 톱니바퀴로 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왜 스스로 인생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대해 마음속 진심으로 우러나온, 진정성 있는 울림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 싫다면서 보고 들은 걸 앵무새처럼 늘어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왜 높은 학점을 받고 싶어하며, 화려한 스펙을 쌓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 취업이나 진학에 유리하다. 당장 생존에 있어 사회 구조와 생계를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굳이 옆으로 치우고서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의 내면과 얼마나 맞닿아있는가.
구체적인 해답을 일목요연하게 대답하라는 게 아니다. 의미는 추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사소한 가치나 삶의 양식이 매일 바뀔지언정, 깊은 마음속 내면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자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유연성이 풍부하고, 민첩성이 뛰어나며 사교성을 갖춘 사람은 이 시대에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다져온 자신만의 판단력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 잘났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걸 알았고 남보다 뭐가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실은 나도 전혀 모른다! 뛰어난 머리도, 대단한 재력도 없고 가치관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것도 아니니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같은 대학의 특출난 이들이 이름을 날릴 때 난 평범한 사회 구성원 A일 확률이 99.95%겠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무엇일까. 그저 좀 더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정도. 혹은 먼 미래에 내 아이에게 지나가는 새나 하찮은 들꽃, 나무의 이름 정도는 불러줄 수는 있겠다. 아니면 뉴턴 법칙이나 미적분의 기본정리를 보며 흥분한 채 설명해줄지도. 질색팔색한다면 소금물을 보고 수포자가 되었다가 다시 수학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해줘야지. 그뿐이다. 그러니 내 말이 맞다고 동조할 이유도 없다. 그런 판단을 할만한 가치도 없으니까. 대신 내 의견에 세부적인 흐름을 지적하며 다른 대답을 쏟아내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 끝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다져온 진심어린 가치를 드러내보이는 사람. 결국 방향이 다른 서로의 물줄기가 비슷한 질감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리고선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 그럼 난 정성껏 커피를 내려줘야지.
밤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빠른 길로 올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왕 늦은 김에 버스를 타고 천천히 돌아오자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한적한 버스를 타는 일은 제가 여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불을 밝힌 상점들을 구경하거나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일이 마냥 좋습니다. 이런 기쁨을 두고 어떤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 따로 지어낼 필요 없이 그냥 ‘유람’이라는 말을 가져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친구와 저녁의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부터가 저녁이며, 또 언제까지를 저녁이라 할 것인가? 하는 조금 쓸데없는 물음에서 시작된 말들이었습니다. 친구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저녁의 시작이며, 더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을 때가 저녁의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지, 먹는다면 누구와 먹을지 고민을 하는 순간부터 저녁이 시작되며, 밥을 다 먹고서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두었을 때쯤 저녁이 끝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각자 내어놓은 답의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었지만, 재미 삼아 사전에서 ‘저녁’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 사전적 정의라고 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풀이를 보고 친구와 저는 동시에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저녁은 오지 않을 듯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지만, 결국 분명하게 와서 머물다가 금세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물론 저녁이 아니더라도 오고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저녁에게, 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