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아보며

글에 부정적인 문장이 많네요. 지금 와서 보니 그랬었다고 쓴 건데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불행을 느끼진 않았어요. 왜인진 몰라도 늘 어떻게든 웃던 아이였으니까요. 환경 덕에 사회화가 덜 된 부분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만나 어떻게 잘 놀고 그랬네요. 여기에 대해선 늘 학창시절 친구들한테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글의 내용만큼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찼던 사람은 아니었으니 감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은 푸르다. 아니, 실은 ‘푸르다’는 표현 하나로는 아쉬운 감이 있다. 기온과 습도가 매일 바뀌듯 하늘의 색은 매번 다르다. 심지어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순간이나, 혹은 저물기 1시간 전 즈음에는 아주 이국적인 색이 나타난다. 어둠이 천천히 걷히며 하늘에서 부서지듯 내리는 햇빛과 온 세상에 명암이 가득하도록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 그리고 일상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빛바랜 장막으로 뒤덮인 일몰 전 사물을 직접 눈으로 보며 비교해보길. 똑같은 하루도 무엇보다 특별한 날이 될 수 있음을 나는 하늘로부터 배웠다.

여기까지 17년 걸렸다.

그 뒤로는 어딘가 고달프고 쓴맛이 나는 ‘인생’이란 글자 대신 ‘삶‘이라는 말로 지나간 시간을 표현했다. 무던히 살아가면서도 어딘가에 희망이 숨어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이 새콤짭짜름한 풍미의 한 음절이 17살 이후의 나를 더 잘 나타냈으므로. 삶의 시간보다 훨씬 길었던 인생은 그렇다 할 기억도 얼마 없다. 인간의 행복은 망각때문이라 했나. 운 좋게도 나는 행복한 유전자를 타고났고, 망각 장치는 본인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냈다. 덕분에 불행과 비관적 우울에는 빠져들지 않았으며 그것과 관련된 어떠한 단어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죽음이 가까워오는 순간까지도 그럴 것이다. 카뮈가 보여낸 삶에의 의지와 반항이 내게 큰 울림을 줬대도,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 하나뿐이라는 그의 말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았으니까. (설령 그 답이 자살이래도 나는 하지 않을 사람이 확실하다.)

다만 인생은 삶만큼 행복할 수 없었다. 늘 도피했다. 눈 뜬 현실이 싫어 게임에 몰두했다. 공부도 싫었지만 집은 더 싫었기에 빨리 독립하고 싶어 공고로 진학했다. 놀랍게도 자퇴까지 도피였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켜 쫓겨나듯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공고에서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그리고 나니 그 무엇도 감당하기 싫었다. 왜 그렇게 막무가내로 학교를 떠나려 하냐는 어른들의 질책은 틀리지 않았다. 어떠한 비전이나 계획도 없었기에. 기자나 연구원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은 있었으나 그건 도피의 부산물이었다. 여태껏 그랬듯 일단 도망쳐놓고 그게 마치 내가 바랐던 태도인 것처럼 떠들어 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세대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버티며 살아낸 인생을 나는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지난 인생처럼 떠밀리듯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은 경쟁심을 갉아먹었다. ‘너 같은 게 뭐라도 될 줄 아냐’며 한심하게 쳐다본 선생의 눈빛을 잊지 않았다. 그런 비판과 조소에게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으나 그런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고, 차츰 나만의 사유 공간에게 자리를 내줬다. 소화할 겸 정해진 시간만 걸으려 했던 산책은 기약 없는 발걸음이 되어 온 동네를 어정거렸다. 가끔은 밑층에서 재밌어 보이는 책을 종일 읽었다. 처음으로 내 삶과 마주했다. 땅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끄집어내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은 외롭고, 또 위태로웠던 시간 속에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향해 나아갔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후론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가치관을 미친 듯이 쌓아 올렸다. 다만 오로지 나 혼자서만 나아갔다. 나를 위해 건넨 모든 충고를 반박해가며 독단적으로 생각했기에 고집불통 그 자체가 되었다. 감정적 호소는 무가치하며 논리적으로 도출해낸 결과만이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었다. 안정을 추구하는 건 노력을 포기한 이들의 나태한 변명이었다. 평범하게 사는 인생은 패배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꽤 단호한 어조로 이 모든 걸 확신했다. 똥고집전차의 공격적인 말도 유순하게 받아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독단적으로 나아갔다. 의지한다는 행위의 장점을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이 꽤 적절한 사유의 공간이라면 대학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다. 게다가 코로나 덕분에 나는 더 침잠해 들어갈 수 있었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삶을 그려냈고, 지금 느끼는 행복의 원천이 어디인지 찾았으며, 앞으로 정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했다. 과거의 ’어떻게‘는 나로 살고 싶었던 발버둥이라면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 나를 투명하게 응시하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물살을 느끼는 순응의 과정이었다.

어떤 일이든 혼자 이겨내려 애쓰는 게 아니라 타인을 믿으며 인간의 ’선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타적 행위도 결국 이기적 본성의 산물이라는 말을 이제는 믿지 않는다. 진정한 배려는 분명히 존재하며 친절을 의심하지 않고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느끼려 노력한다. 삶은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신경 써야 한다. 가끔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안에서 허덕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부정할 만큼의 힘은 절대 없으며, 되려 천천히 그 감정을 음미함으로써 내 삶을 더 사랑하게 되는 발판을 만들어낸다.

실용적인 논리로는 당최 알 수 없는 세상의 오묘한 아름다움은 행복을 믿을 수 없이 크게 만듦을 알았다. 먹이를 찾으려 부지런히 낙엽을 파헤치는 지빠귀를 바라보는 시간, 다시 되돌아올 길을 오르는 정상으로 향하는 과정,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며 생각치도 못한 구도를 담아내는 사진, 창작의 고통 속에서 품어져 나온 그림을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 손 끝에서 피어 나오는 쇼팽 발라드의 낭만적인 선율,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비논리적인 행위가 삶을 더욱 견고하게 에워싼다. 여행은 나를 찾는 과정이란 말을 이제야 가슴 속 깊이 받아들인다.

성공과 행복에 대한 채색은 터무니없이 달라졌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삶에서 자연스레 떨어져 나오는 부산물이며 성공을 향한 과정은 값진 결과보다 더 소중하다는 윤곽은 여전하다. 다만 그 속에서 나를 기계적으로 조이던 나사를 느슨하게 했다. 이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똑같이 일과 돈에 치여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 어릴 때 그토록 혐오해 도망갔던 어른의 인생을 향해 나는 삶과 함께 걸어간다. 다만 나는 살아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갈 것이다. 지겨운 일상의 똑같은 반복을 누구보다 사랑할 것이며 그닥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의 부모가 되고 싶다. 다를 것 없는 하루에게 미소를 건네고 지나온 길에 본 강아지를 떠올리며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웃어 보인다.

귀찮은 잔소리에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남이 시키는 공부를 거들떠도 안 보는 아이에게 묻고 싶다. 너의 시간을 반짝이게 만드는 게 뭐니? 경제적 가치와 기능적 존재 이유가 아니라, 진정으로 당신의 틈에서 피어나 온새미로 미소 짓는 영겁의 원석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해 한다. 자신의 삶이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이들처럼 시덥잖은 말을 꺼내기 싫다. 지난 날의 상처가 당신의 부드러운 살결을 얼마나 깊이 파고 들었는지, 벌어진 싹의 틈에서 자기도 몰랐던 모습을 보며 미워하고 싫어하다가도 결국 두 팔로 있는 힘껏 끌어 안았는지 묻는다. 약간은 쑥스럽기도 한 과거의 눈물이 연약한 모래를 감싸는 물줄기가 된 사실에 작게 웃어 보이며, 결국 긍정하기로 한 당신의 흉터를 나는 진심으로 아름답다 느낀다.

비웃을 수도 있다. 이런 나를 멍청하다고 꼬집으며 진정한 삶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조소할지도 모른다. 아,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신난다. 완전히 달라지고서 나를 얼마나 멍청하다 여길까. 걷자. 지금까지 지었던 미소보다 더 활짝 웃어보이며 즐겁게 걸어가자. 결국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에게는 절대 긁어낼 수 없는 강인한 내면이 있으니까. 더 이상 임시방편의 실존주의 위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외딴 섬에 발을 디딘 적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삶의 고통에 둔감한 유전자를 쥔 채 걸어나왔으므로.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다.

나는 삶을 진심으로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