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즈막한 목요일 오후

갈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냥 마실 것 하나를 사고 싶어 보리차를 들고 계산대로 간다. 거기엔 이미 바코드 입력이 끝난 것들이 새 주인에게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카드를 꽂아달라는 무심한 말에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고 옆머리가 짧은 거무튀튀한 피부의 사내가 카드의 IC칩이 어디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꽂아야 하는지 약간 머뭇거리며 회색빛 카드를 다시금 훑어본다. 그의 손은 투박하다. 생애에 핸드크림을 열 번조차 사용하지 않았을 손에는 깊게 패인 주름이 얼기설기 놓여있다. 자연광이 태워놓은 어두운 황갈색의 손에는 주름보다도 살결 자체가 거칠다는 인상을 준다. 이제 보니 짧은 옆머리에 흰머리가 반짝이며 어정거린다. 으레 그 나이대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눈가와 입가에 나이테가 서려있다. 다만 그간의 세월이 조금 고되었는지, 혹은 날 때부터 그런 인상이었는지 그닥 부드러운 호감은 주지 못한다. 그가 들고온 건 삼립호빵 두 봉지와 인공적인 단맛이 나는 커피 한 캔이다. 그 남자가 호빵과 함께 사무실로 향하는 상상을 한다. 사무실에는 흰색 전자레인지가 우두커니 서있다. 너무나 당연한 바람에 문명의 걸작에게 감사함조차 잊은 사내는 방금 사온 호빵에 약간의 물을 적셔 전자레인지에 넣고 작동시킨다. 다 되었음을 알려주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기를 잔뜩 머금은 호빵을 꺼낸다. 가운데 부분을 살짝 찢으니 김이 잔뜩 피어오른다. 세월에 굳어버린 얼굴은 피어오르는 열기에 인상 쓰듯 찌푸려진 미간 말고는 전혀 변화가 없다. 투박한 손으로 캔커피의 뚜껑을 딴다. 뜨거움을 느끼며 게걸스레 호빵을 먹어치우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투박한 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호빵의 온기를 느낀다. 내 앞을 지나 문을 열고 나가는 사내에게 나는 일종의 동류애를 느낀다. 이름도 모르는 그의 삶은 어떠한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쌀쌀해진 느즈막한 목요일 오후 4시의 고단함과 바스라지는 단맛을 호빵에 담아낸다. 알랭 드 보통이 풀어쓴 바램을 볼 한쪽에 머금는다.

"엔지니어의 간결성이 적용되어 이익을 볼 수 있는 감정의 예는 부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가령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따금씩 생기는 이상한 욕망을 우아하게 암시할 수 있는 기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이것을 b라 해두자). 자신의 병을 두고 친지가 자신보다 더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때 느끼는 짜증은 w라고 할까. 또 가끔 삶의 다양한 시기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그래서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j라고 해보자. 이런 표기 체계를 갖고 있다면 일요일 오후면 느끼곤 하는 그 제멋대로 둥둥 떠다니는 노스탤지어와 불안을 압축해서 모호한 구석이 전혀 없는 하나의 명료한 수식(b+w+jx2)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아무 도움 안되는 투덜거림만 늘어놓기 십상인 주위의 친구들한테서도 공감과 동정을 끌어낼 수 있을 텐데."

일의 기쁨과 슬픔 - 알랭 드 보통